윤영주 선임연구원

기사입력 2009.10.08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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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의학의 정체성 확립과 미래 발전 방향
    (4) 전통의학과 현대의학의 연계 발전의 당위성과 방안

    현재 한국사회에서 한의학과 서양의학의 협력은 한의학 내외에서 모두 요구되고 있다. 우선 전 세계적으로 미래의학은 ‘통합의학’으로의 길을 향해 가고 있고, 한국의 의료 소비자는 ‘진정한 협진’을 원하고 있다. 정부는 두 의학의 협력이 한국 의료서비스산업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 의료법을 개정하여 내년 1월부터 상호 진료과목 설치와 상호고용을 허용했다고 보인다.

    또한 한의학이 문화전통이나 철학으로서만이 아니라, ‘치료 의학’으로 생존· 발전하는데 필수적인 ‘치료 효과의 입증’을 위해서도 서양의학계와의 소통·협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현대 서양의학(과학) 방법론의 수용은 한의학의 서양의학화를 가속화할 뿐이며, 협진 또한 흡수 통합으로서의 의료일원화로 가는 전 단계가 될지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필자 또한 이런 지적에 십분 공감하며, 한의계가 높은 내적 통일성과 자부심을 가진 상태에서 급변하는 대내외적 환경에 주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현실에서 떨어진 독립 공간 속에서 자체 대오 정비부터 먼저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이제는 방법론과 구체적 내용을 고민할 때이다. 두 의학의 협력 방안과 발전 방향성은 결국 어떤 ‘주체’가 어떤 ‘방법론’을 가지고 추진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90년대 초반부터 거의 20년 가까이 여러 의료기관에서 한·양방 협진을 시도해 왔지만, 아직도 무늬만 협진이라는 평가를 받는 근본 이유는 무엇일까? 임상경험이 짧은 의료인을 고용하여 필요한 부분만 해결하고, 새로운 수가를 창출하여 의료 비용만 늘리는 식으로는 실패의 전철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서로 경쟁적·대체적인 영역보다는, 위중한 질환이던 사소하지만 삶의 질과 관련이 높은 질환이던 서양의학에서 해결 방법을 갖지 못한 영역에서 한의학의 치료 효과를 보여주어야 한다. 한의사-의사-환자 모두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상호 보완의 영역에 먼저 집중하는 것이 상호 이해 증진과 협진 확대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협진이 위력을 발휘하려면 협진의 주체 또한 각 분야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최고의 만남이 되어야 한다. 일류 병원의 명의-한의계의 명의(재야의 고수들까지 포함하여)의 결합으로 적은 숫자라도 3차 진료단계에서 모범적인 협진 사례가 만들어지면 큰 파급효과를 가지면서 전체 협진의 질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의료인들의 신뢰도 그런 치료 경험의 토대 위에 쌓아질 수 있다.

    한의사와 환자들은 임상에서 한의학의 진단과 치료, 예방, 건강 증진의 효과를 충분히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의료제도 안에서 한의약 치료의 입지를 넓혀 나가기 위해서는 이미 존재하고 경험하는 치료효과를 ‘객관적인 근거’로 만들어내어 보여주어야만 한다. 철저하게 한의학 이론과 방법으로 질병을 치료한다 해도, 대중들이 서양의학의 질병명, 진단기준, 치료효과 평가 도구들에 익숙한 현실에서는 서양의학의 도구와 연구방법론 수용이 필요하다. 더욱이 의료 인력이 함께 하는 공동 임상연구는 협진의 든든한 밑바탕이 될 수도 있다.

    요즘은 한의계에서도 어딜 가나 EBM(Evidence Based Medicine :근거중심의학)과 RCT(Randomized Controlled Trial :무작위 배정 대조군 임상연구)를 이야기한다. 이것은 또 하나의 편향이 될 수 있으며, 임상연구에서 서양의학의 방법론을 무비판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경계해야만 한다. RCT를 가장 높은 수준의 근거로 여기지만, 기계적인 RCT는 한의학적인 질병과 치료 개념에 적합하지 않음이 분명하고, 이미 서양의학 내에서도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연구방법론들이 개발, 시도되고 있다.

    앞으로의 임상연구에서는 위약이나 거짓침 사용, 환자 눈가림 등을 절대시하지 않으며, 환자에 따른 개별화된 치료도 허용하는 실용적 임상연구방법론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또 질적인 환자 사례 연구, 장기간의 추적 관찰 역학연구, 비용·접근성 등 건강 서비스 차원의 연구로 연구 영역을 확대하고, 한의학 원리에 맞는 연구방법론을 개발하려고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

    한편 한의약 치료기전을 밝히는 기초연구에서는 현대과학, 의학의 기술과 도구들을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 시스템 생물과학, 에너지 의학 등의 이론은 두 의학의 접목이나 융합에 도움을 줄 수 있고, 생물광자 측정, 인체 미세 자기장 측정, 인체 기능의 영상화, 유전체학 등도 한의학 연구를 위한 훌륭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진료와 연구 양 측면에서 협력의 새로운 주체들이 어떻게 형성되고, 새로운 방법론에 의한 성과물을 얼마나 빨리, 또 풍부하게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그 결과가 한의학 이론은 도태되고 일부 치료수단만 서양의학 속으로 편입될지, 아니면 한의학 고유의 방법론과 내용으로 서양의학 자체를 새로운 의학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지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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