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교수
경희대 기후-몸연구소, 한의대 의사학교실
여름은 계속된다
광복절 즈음에 더위가 한풀 꺾인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처서에도 매직이 일어나지 않는다. 8월을 넘기고 9월이 되어도 우리는 폭염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했다. 섭씨 33도 이상일 때 공식적 폭염 특보가 발령되지만, 9월에 폭염주의보가 내린 지역도 있었고, 심지어 폭염경보가 내린 곳도 있었다1). 추석이 되어도 여름은 계속되었다.
바로 앞 문장은, 말이 되지 않는 문장이다. ‘가을 저녁[秋夕]이 되어도 여름이 계속된다’는 말은 말이 안된다. 하지만 기후위기의 현실에서는 가능했다. 가을 저녁에 여름이 계속되는 일이 일어났고, 열대야까지 이어졌다.
추석 연휴 이후에 요란한 비가 내리고 폭염은 물러났다. 하지만 여름은 계속된다. 폭염이 없는 것에 안도하기에는 고온이 지속되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해 졌다고 여름이 물러난 것은 아니다. 이어지던 열대야가 사라졌다고 가을다운 날씨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낮 기온은 30도를 육박하고, 한낮의 볕이 가을볕이 아니다. 여름 낮 더위가 지속되고 있었다.
시베리아에서 찬 공기가 내려오고, 낮 기온도 꺾일 날이 올 것이다. 그래도 여름은 계속된다. 다시 10월 새벽의 서늘한 공기를 밀어낼 정도로, 여전히 열기는 기세등등하다. 하지만 그 열기도 끝이 있을 것이다. 12월이 되고, 기어이 낮의 고온은 물러갈 것이다. 눈도 내릴 것이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기록적 고온의 지난 여름도, 더웠던 어떤 해의 기억으로 저장 공간에 밀어 넣을 것이다. 망각 속에서 기후위기의 문제를 잊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름은 계속된다.
이른 봄부터 덥기 시작한다. 4∼5월에 이상 고온의 뉴스가 헤드라인을 장식한다(이상 고온이라는 말이 이제 더 이상 적절한 단어가 아니게 되었다. 봄에 이상 고온이 매년 찾아온다면, 이상 고온이 아니라 일상 고온일 것이다). 때 이른 고온은 늦은 가을까지 계속된다. 봄, 가을을 장악한 장기지속의 여름 속에서 난방을 끄자마자 에어컨을 켜야 하는, 또한 에어컨을 끄자마자 난방을 틀어야 하는 시대에 우리는 직면해 있다(혹은, 하루 중에도 밤에는 난방을 켜야 하고, 낮에는 에어컨을 틀어야 하는 날도 있다). 겨울이 온다고 여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기후위기의 여름이 녹인 북극과 남극의 얼음은 겨울 날씨에까지 영향을 준다.
돌출된 여름, 흔들리는 사시
멕시코만류가 멈춘다면, 북유럽은 길고 심각한 겨울 속에 여름이 내재해 있는 겨울을 맞게 될 것이다. 멕시코만류는 북중미의 멕시코 만, 카리브 해에서 북유럽 쪽으로 따뜻한 바닷물을 흐르게 하는 해류다. 난류가 흘러줘서 북유럽의 도시들이 번창할 수 있었다. 사할린과 비슷한 위도에 있는 고위도의 런던도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대도시가 될 수 있었다. 아이슬란드까지도 레이캬비크 같은 수도가 건설될 수 있었다.
멕시코만류가 북쪽으로 계속 흐르기 위해서는 북극 쪽에서 차가운 기온이 유지되어야 한다. 찬 기운에 염분의 밀도가 높아져서 표층을 흐르던 해류가 다시 심해로 내려가야 다시 남쪽에서 따뜻한 새 바닷물이 올라올 수 있다. 하지만 장기간 고온의 여름은 바다 수온을 높이고 있다. 또한, 높은 기온으로 빙하에서 녹아내린 담수는 바닷물 염분의 밀도를 낮추면서 따뜻한 바닷물이 북쪽으로 올라올 수 있는 여지를 상쇄하고 있다. 지구과학연구들은 멕시코만류가 느려지고 있으며, 멈추는 시기가 가까워졌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그 해류가 멈춘다면, 북유럽은 전에 없던, 길고 심한 추위의 겨울을 경험하겠지만, 그 안에 이미 여름의 영향이 내재한 겨울이 될 것이다.
사시음양이 만물의 근본이라는 것은2) 생명의 리듬을 말하고 있다. 봄의 따뜻한 기온이 밀어주어 여름은 여름다울 수 있었다. 한여름이 지나고 더위가 한풀 꺾이면 여름은 가을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하강하는 가을의 여세로 겨울은 추운 석 달을 가질 수 있었다. 늦은 겨울은 봄을 초대하고, 이 흐름을 타고 봄여름가을겨울은 하나의 흐름으로 흘렀다. 이 리듬과 가락에 맞춰 생명들은 생하고, 자라고, 열매 맺을 수 있었다. 겨울 나목들은 봄의 기대 속에 저장하는 기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제는 봄여름가을겨울의 순조로운 사시가 없다. 여름이 돌출되어 모든 계절에 영향을 미친다. 봄기운에서 여름기운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가을에서 겨울로 전해지던 순조로운 흐름이 흔들린다. 이것은 병적인 상황이다. 몸의 병리적 상태와 같이, 어떤 기운의 돌출로 막힌 흐름이 지구를 아프게 한다.
기후위기 시대에는, 기온보다 체감온도를 말해야 하는 시대이다(이전 연재글 <인류세의 한의학> 34, “체감온도” 참조). 기온이 공기의 온도라면, 실제로 우리가 접하는 기온은 몸이 경험하는 체감온도다. 기후위기 속에서 기온보다 체감온도가 더 중요한 용어가 되고 있다. 이제 체감계절이라는 말도 사용해야 할 상황이다. 6, 7, 8월만을 여름이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여름이 봄과 가을의 기간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3, 4, 5월 봄과 9, 10, 11월 가을의 구분도 무의미하다. 우리는 체감온도와 같이 체감계절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실제 느끼는 계절을 말해야 할 상황이다. 가을이지만, 체감 계절은 여름이고, 봄이지만 체감 계절은 여름인 때가 더 많아지고 있다. 겨울에도 깊은 곳에선 여름이 남아서 겨울이 겨울답지 못하게 하고, 그 이상 겨울에 우리 몸은 노출된다.
조응
몸은 세계에 조응한다. 조응이 몸-존재를 만들었다. 기후와 몸의 조응은 가까운 예시를 제공한다. 잠깐의 산책으로도 체온은 올라간다. 체온을 낮추기 위해 몸은 땀을 발산한다. 실내에 들어와서 불어오는 에어컨 바람에 또 몸은 응대한다. 모공을 닫고 찬 기운을 견딜 준비를 한다. 인간의 몸이 지금의 몸이 된 것도 조응의 결과다. 인간의 손은 잡고, 짚고, 오므리고, 여는 것을 자유롭게 하는 손이다. 이것은 도구를 사용하고, 글씨를 쓰고, 요리 하는 인간을 가능하게 한 다른 동물과 차별화되는 중요한 특징이다. 이 손은 인간만이 만든 것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에 있어 오랜 기간 동안, 인간의 몸이 잡아왔었던 것들의 흔적이 이 손에 남았다. 그 수많은 잡음의 경험들이 쌓여서 지금의 손이 되었다. 세계와 몸의 조응이 이 몸이 되었다.
의료 또한 조응에 주목해왔다. 몸과 바깥 기운과의 주고받음이 외감에 대한 관심으로 드러났다. 사회문화 속 일어나는 칠정에 대한 관심이 칠정상에 대한 논의로 나타났다. 더 이상 세 달씩 나눌 수 있는 계절이 아니라면 이에 대한 관심도 필요할 것이다. 계절이 아니라 체감계절이 더 적당한 표현인 시절이라면, 몸이 체감하는 계절에 대한 관심이 요구된다. 장기지속되는 여름의 시대라면 몸도 장기지속의 체감여름을 경험할 것이다. 그만큼 장기지속의 여름을 사는 몸이라면, 그에 맞는 의료적 대처도 필요할 것이다. 장기간의 체감여름이 지속된다면, 몸은 다른 기후환경에 놓이게 될 것이고 그에 응대하는 몸의 상황도 다시 돌아봐야 할 것이다.
기후위기 시대에 체감온도는 필요한 언어이듯이, 체감계절도 필요한 용어다. 정해진 계절만 가지고는 이 변화의 기후를 다 말할 수 없다. 변화의 기후는 기존의 변화의 범주를 벗어나므로, 정상이 아닌 변화다. 이 병적인 기후 속에 있는 몸도 질병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사시가 흔들리니 몸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기후변화에 응대하는 기후의학이 특히 요구되는 시대다. 몸이 세계에 조응한다면, 그 몸에 잘 조응하는 의료도 필요한 시대가 기후위기 시대이다. 그 몸의 변화에 조응하는 의학이 요구되는 시대다(인류세의 한의학 36 "체감기후"에서 계속).
1) 섭씨 33도 이상이 이틀 이상 계속될 때 폭염주의보를 내리고, 35도 이상이 이틀 이상 지속될 때 폭염경보를 내린다.
2) “四時陰陽者萬物之根本也” 『내경』 「사기조신대론」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