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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항일영웅 한의사 독립운동가 신현표 선생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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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항일영웅 한의사 독립운동가 신현표 선생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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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표 선생

 

 

1930년 1월 26일 광주에서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대규모의 학생항일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서울, 대구, 부산, 평양에서 학생들이 참여했다. 멀리 연변까지 그들의 이야기가 흘러들어왔고 많은 조선인 학생들이 이번 운동에 참여하기로 했다. 나도 그들의 뜻에 동조하기로 했다. 가만히 앉아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기는 싫었다. 물론 서양의업을 배우고 의사의 길을 택하기로 했던 내가, 운동에 나서는 결심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요시찰 집안으로 의사 시험을 몇 번 신청해도 수험번호조차 받지 못했다. 시험에서 여러 번 제외된 적이 있었지만, 가까스로 양의사 면허를 취득할 수 있었다. 자칫하면 어렵게 취득한 양의사 자격증이 사라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대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기에는 가슴이 뜨거워져 견딜 수 없었다.

요시찰 집안의 삶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작은 아버지(신홍균)는 만주 지방 명의로 수십 년간 한약국을 운영해 명성이 자자했다. 그런 작은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시작하자 일본은 우리 집안을 호감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이는 내가 가진 희망에 방해가 될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작은 아버지를 원망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명의로 소문난 작은 아버지 덕분에 한의학을 스물이 되기 전부터 수학하고 때로는 침술도 배울 수 있었다. 스물넷이 되어서는 양의학 공부에 집중해 3년간 개인 사립의원에 종사하기도 했다.


“참혹한 짓에 대해 가슴에 원한지심 품고 있어” 

많은 것을 잃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운동에 나선 것은 작은 아버지의 영향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는 없다. 또 하나, 나는 일본이 우리 가족에게 벌였던 참담하고 참혹한 짓에 대해서 여전히 가슴에 원한지심을 품고 있다. 

작은 아버지가 대진단 단장으로 맹활약하던 당시 내가 열일곱 되던 해 가을, 삼숙 신동균이 죽임을 당했다. 중국 지방 압록강 연안 봉천성 장백현 십오도구 대구사 지방에 생활 중 압록강 건너 함경남도 삼수군 강진면 두지리 나람포 왜정 주재소 헌병대의 암살대가 월강토벌하여 삼숙을 죽였다. 

암살하고 압록강에 수장까지 시켰으니 가족들이 품고 있는 원한과 분노를 어찌 사그라뜨릴 수 있겠는가. 만약 그때 나도 그곳에 함께였다면 필시 일본군 손에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내 목숨이 살아있는 건, 우리 가족을 지키기 위함이요, 또 우리 가족이 품어온 뜻을 이어가라는 뜻이 되기도 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저 멀리 만주에서 독립군을 꾸려 활동하는 작은 아버지에 대한 소식은 간간이 전해져 오는 서신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홍균이 마누라가 불쌍하지. 잘난 의사 만났다고 집에서는 경사가 났었는데 말이야.”

아버지는 항상 안타까운 심경을 담아 이렇게 얘기하고는 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작은 아버지에 대한 후원은 아끼지 않았다. 몸으로 도울 수 없지만, 경제적으로나마 도울 수 있어 다행이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고는 했다. 

나는 광주 학생운동이 일어난 배경에 관심을 가졌다. 곡창지대인 호남 지역에 대한 일본의 착취가 가혹했던 모양이었다. 그들의 착취가 심해지며 반일감정이 격화됐다. 또 3·1만세 운동 이후 민족운동의 방편으로 각급 학교에서 조직되었던 독서회와 동맹휴학의 열풍이 일며 이번 운동이 전개됐다. 

우리 사회는 항일 분위기가 충만한 시기였고 학생들의 항일맹휴가 그치지 않았다. 사회는 불경기로 전반적으로 침체하여 있었고, 앞날이 보장되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반일감정은 날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광주 운동은 성진회(醒進會)의 조직에서 시작됐다. 성진회는 일본의 억압에서 탈피하겠다는 독립 정신과 사회과학의 연구, 식민지 교육체제 반대라는 민족적 사회적 방향 의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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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교육을 노예교육이라 비판하며 구호 외쳐

연변에서는 학생들이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근대 학교가 세워지고 민족교육운동도 활발히 전개되고 있던 이유가 클 것으로 생각됐다. 사회단체와 연계되어 학생운동이 고양되고 있었다. 룡정의 각 중학교에서는 동맹휴학을 단행했고, 거리로 많은 학생이 나섰다. 

그들과 함께 거리로 나가 태극기와 수기를 흔들었다. 일본 제국주의 타도와 광주 학생 사건으로 검거된 학생들을 석방하라고 소리쳤다. 우리는 일본의 교육을 노예 교육이라 비판하며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우리의 시위 행렬은 일본영사관 앞까지 서로의 등을 의지하며 앞을 향해 나아갔다. 이곳에서 앞장섰던 학우회 간부들이 현장에서 50명 넘게 체포됐다. 일본 경찰은 우리를 가축처럼 취급하며, 우리들의 간절한 외침을 듣지 않았다. 오로지 무력으로만 제압하려는 그들의 탄압에 시위는 멈춰질 수밖에 없었다. 

1930년 2월 3일 일본은 만주총국 간부들의 검거에 나서기 시작했다. 만주총국의 선전부장에 취임한 장주련은 총국 동만도 책임비서인 윤복송, 선전부장 강석준 등과 밀의하여 3·1만세운동 제11주년 기념식을 처음으로 준비했다. 우리는 그간 받았던 민족의 울분을 터트리기 위해, 이에 동참하여 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동만주(북간도)에 3·1 만세운동 제11주년 기념준비위원회를 비밀리에 조직하고 위원회 지도로 1930년 3월 1일을 기하여 농민, 학생, 노동자의 일대 시위를 전개하려고 했다. 3·1절을 기리며 다시한번 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학생들을 비롯한 많은 시민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시간 지날수록 항일운동이 계급투쟁으로 변질

많은 이들이 함께한 것은 그동안의 핍박과 설움이 컸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비록 중국 땅에 있기는 하지만, 조선총독부 일본 헌병 주재소가 설치되어 있어, 일본의 감시와 민족적 차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일본이 했던 만행에 말로는 모두 표현할 수 없는 멸시와 서러움의 나날이었다. 

그렇다고 모두가 하나의 뜻으로 통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지식인 중에는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고 공산당 운동을 펼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자신의 철학이 없이 이들의 단체에 가입하는 데 있었다. 이들은 단순히 일본과 대항할 수 있다는 급한 마음에서 가입했다. 일본군 하나라도 더 쓰러뜨리려면 무기가 있어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의 운동이 계급 투쟁적으로 변해가면서 민족주의자들, 아나키즘 계열 인사들과 적을 두게 되었다. 그들은 혁명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러나 혁명이 최우선 순위에 올라야 한다고 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힘들었다. 공산주의자들의 신념과 철학,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 동의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인(仁)의 정신이 결여된 혁명은 옳지 않다고 여겼다. 나는 명분을 찾고, 뜻을 펼치기 위한 혁명에 들어갔다.


* 정상규 작가는 지난 6년간 역사에 가려지고 숨겨진 위인들을 발굴하여 다양한 역사 콘텐츠로 알려왔다. 최근까지 514명의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들의 보건 및 복지문제를 도왔으며, 오랜 시간 미 서훈(나라를 위하여 세운 공로의 등급에 따라 훈장을 받지 못한)된 유공자를 돕는 일을 맡아왔다.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정상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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