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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박성수 “1919년 기미독립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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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박성수 “1919년 기미독립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

정상규 작가의 한의사 독립운동

박성수(朴性洙,1897.8.12.~1989.2.15)는 충북 청주 출생의 한의사로서 1919년 기미독립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10개월 간 감옥에 수감된 독립정신이 투철한 인물이었다. 이 시기에 쓴 그의 한시는 망국의 설움에 대한 감회가 베어져 있다.

 

박성수 선생.jpg
박성수 선생

 

 

“生於亡國世 何物滿腔腸 血塊凝義赤 一噴洗東洋

囹圄今日事 痛哭仰者天 擊欄還一笑 白日復照然

人末百年有死生 孰能死死孰生生 宋端囚燕全忠死 雲長許魏仗義生 生欲偸生生還死 死於當死死亦生 嗟我二千萬同胞 一心無礎是死生

鐵窓讎日若如年 抱膝黙吟坐一邊 茄飯茄湯時喫後 爲何向壁反成眠”

“나라 망한 세상에 태어나서 무엇이여...오늘 일은 하늘을 향해 통곡하고 살아서 살고 싶어도 살고 죽고 죽어도 죽고...지난 백 년 동안 누가 죽을 수 있을까? 어쩌면 생명의 선을 위해 싸웠고, 죽음을 위해 생명의 선을 위해 살았는지도 모른다. 우리 동포 2천만 명은 근거도 없이 죽었다.”


3.1만세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1년 1개월간 감옥 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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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3월27일 약업신문. 박성수 한의사(오른쪽에서 첫 번째)의 한의학 현대화 등 공적을 조명한 기사.

 

호 일송(一松). 충청북도 청주 출생. 한의사 기업가 교육자. 박성수 한의사에 대한 세간의 평이다. 그러나 그가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은 많은 사람이 모른다. 1897년 8월 12일 출생한 박성수는 유교가문에서 출생했고, 일제강점기 식민교육을 시행하는 학교교육을 받는 것에 반대했던 선친의 뜻을 따라 13세부터 한학에 입문했다. 

이후 한의사 이상열에게 한의학을 배웠고, 그후 한의학 공부에 매진하여 경성 한의약전수학원을 졸업했다.

24세가 되던 1920년 그는 한성약업사 및 대창약업사를 창업했다. 이해 9월 독립자금과 밀서를 전달하며 1919년 3.1만세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1년 1개월간 감옥에 수감됐고 혹독한 고문 끝에 간신히 살아나왔다.

1925년 감옥에서 나온 뒤 그는 약업에 전념하며 또 다른 회사를 창업했다. “우리 나라의 건강은 우리가 지킨다”라는 신념으로 한의학의 현대화를 목표로 하는 조선무약 합자회사(줄여서 조선무약)였다. 조선무약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제약사며 <솔표 우황청심원>, <위장약>, <위청수> 등 대표적인 한약들을 개발했다. 특히 <솔표 우황청심원>은 한약의 현대화에 크게 이바지한 제품이다.


독립 운동가들 편지 전달…정부, 독립유공자로 선정

 

박성수는 회사설립 초기 방방곡곡에 약재를 나르며 독립운동가들의 편지를 함께 전달했다. 만세운동에 참여했고 그 이후 행적의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에 선정됐다. 해방 전 그는 양정중학교(1939), 경복중학교(1945), 계동국민학교 등의 후원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1950년 박성수는 수양한의원을 개설했고, 6·25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 온양에 <국립구호병원>을 설립해 다친 장병들과 마을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전념했다. 같은 시기 부산 피난 시절에는 전란 중임에도 불구하고, 한의사제도를 만들기 위해 동료 한의사들과 고군분투했다. 이런 공로로 1953년 서울시 한의사회 초대회장에 피선되어 활동했고, 1954년 한의사협회 기관지 <東洋醫藥>의 발행인으로 활동하면서 개인재산을 털어 창간작업에 매진하기도 했다.

 

1955년 박성수는 동양의약대학의 설립인가를 얻어냈다. 같은 해 8월 동양의약대학에 약학과가 병설됐고, 1964년에는 동양의과대학으로 개칭됐다. 이에 따라 수업 연한이 6년제로 바뀌어 국내 한의사 양성 기반이 확고해졌다. 

이 대학이 바로 지금의 경희대학교 한의과다. 박성수는 1957년 한국에서 두 번째 한의학 교수가 되어 경희대학교에서 제자들을 육성했고, 이때 제3대, 제4대 대한한의사협회 회장이라는 중책을 역임했다. 그가 회장을 맡은 시기를 가만 들여다보면 4.19혁명과 5.16군사쿠데타 등 나라의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은 시기였다. 

1957년에 간행된 <忠淸人士集>에는 충청도 출신 인물 가운데 공적이 있는 인물로서 그를 소개하고 있다. 그 자료에 따르면 앞서 언급한 양정중학교 후원회장부터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의예과 후원회장(1945), 서울 사립중학교 후원회 연합회장, 한양국립구호병원 건설위원장, 한의사 국가시험위원, 대한적십자사 서울지사 상임위원, 대한한의사회 회장 등을 역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비보가 들려왔다. 1961년 당시 국가재건회의에서 한의사제도 관련 법률을 삭제해버리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때 박성수를 포함한 초기 한의계 원로들은 한의사제도 폐지획책을 저지하고 한의사의 법적 지위가 확보된 의료법안을 통과시키려 엄청난 노력을 했다. 

당시 다른 대학들은 재단만 있으면 문교부에서 인가가 나오지만, 한의과대학은 보건사회부 장관의 승인이 떨어져야 문교부에 넘어가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의계에는 정치인도 재력가도 없었는데 반해 세력을 형성한 양방 측이 한의대 설립을 필사적으로 저지했고, 사회적으로도 서구문화의 득세로 한의에 대한 인식도 바닥에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박성수는 오한영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과 내무부장관, 문교부 장관 등 각 요직에 손을 써 한의대 인허를 받아내는 한편, 법 제정 쪽에 관심을 쏟아 국민의료법 제2조 의료업자 종류에 ‘한의사’를 삽입, 명문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검정고시의 길도 열린 것이다. 최초의 ‘한의사전문의’ 시험은 2002년 1월 31일이었다. 이때의 무수한 노력 끝에 현재까지 한의사제도, 한의사 전문의시험 등의 맥이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것이 아주 오래전의 일이 아님을, 아주 가까운 과거의 일이었으며, 이러한 제도가 정착되기까지 많은 선배의 노력과 희생이 따랐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법률상 한의사제도 정립 위해 눈부신 활약”

당시 박성수는 한의학 분야 외에 전통문화 계승과 교육 사업에서도 남다른 이바지를 했다. 한시에 탁월한 실력을 발휘, 대만까지 명성을 날렸다. 실제 한국 한시 협회를 조직해 회장으로 활동했고, 대만에서는 한시 학회 고문으로 추대됐다. 

또한, 1968년부터 그가 40여 년 전 개발한 <솔표 우황청심원>이 해방 후 일본 전역에 수출되기 시작했고, 그는 ‘스타’ 한의사로 일본에 초빙되어 각종 세미나에서 학술 발표를 진행하기도 했다. 

뭔가 기분이 묘하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가 만든 한약이 해방 후 일본 전역에서 불티나게 팔린다니 말이다. 이러한 그의 경제-무역 분야의 기여에 따라 1969년부터 1972년까지 무려 세 차례에 걸쳐 수출 유공 표창을 받는다. 

그를 기억하는 동료 한의사 박남중은 당시 회고담에서 “정부의 부산 피난 시절, 최초의 한의과대학 인가와 법률상 한의사제도의 정립을 위해 일송(박성수)은 부산역 앞 중앙동 삼성여관에 기거하면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라고 말했다. 

1989년 2월 15일 93세의 일기로 타계한 박성수는 평생 한의학자(韓醫學子), 한학자(漢學子), 제약회사 CEO, 교수 등으로 알려졌지만 이제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로 그를 기억하고 싶다.

 

*  정상규 작가는 지난 6년간 역사에 가려지고 숨겨진 위인들을 발굴하여 다양한 역사 콘텐츠로 알려왔다. 최근까지 514명의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들의 보건 및 복지문제를 도왔으며, 오랜 시간 미 서훈(나라를 위하여 세운 공로의 등급에 따라 훈장을 받지 못한)된 유공자를 돕는 일을 맡아왔다.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정상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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