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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憲泳(1900-1988)의 생애(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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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憲泳(1900-1988)의 생애(4)

백유상1.jpg
백유상 교수
경희대학교 원전학교실 

해방 직후 趙憲泳은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준비위원회 사무차장을 맡고 원세훈과 함께 조선민족당을 조직하였다가 韓國民主黨 결성에 참여한 후 지방부 부장 등을 맡게 된다. 1946년 2월에는 大韓民國非常國民會議 후생위원, 동년 11월에는 韓國民主黨 상임위원, 1947년 1월에는 반탁독립투쟁회 중앙집행위원, 동년 10월에는 韓國民主黨의 중책인 조직부장이 되었다. 

대체적으로 중도우익의 진영에서 활동하면서 1948년 5월 10일 총선에서 단일 후보로 경북 영양군에서 무투표 당선되었다. 당선 이후에는 헌법기초위원 등을 맡았으며, 특히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추진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의 반민족행위처단법을 견제하는 담화 등에 대하여 반대하는 발언을 하였으며, 국가보안법의 제정에 대해서 반대 입장을 내기도 하였다. 

 

1948년 10월 韓國民主黨을 탈당한 이후 우익과 더욱 등을 돌리게 되어, 1948년 12월에는 친일경찰 노덕술 등에 의한 반민특위 위원들과 정부요인의 암살계획이 폭로되기도 하였고, 1949년 6월에는 폭도들이 경북 영양군의 趙憲泳 본가에 침입하여 가옥을 전소시키고 금품을 탈취하는 일이 벌어져 이 과정에 경찰 및 주민 등 2명이 사망하기도 하였다. 

이후 趙憲泳은 韓國民主黨을 탈당하고 잠시 民主國民黨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다시 탈당한 후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1950년 5월 30일 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국회를 개원한지 일주일도 못되어 한국전쟁이 일어났으며, 전쟁 동안 趙憲泳은 납북되어 이후로 남한에서는 더 이상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된다.


한의사제도 배제한 洋醫단일법안 강력히 반대

趙憲泳은 제헌국회 활동 기간 동안 국회의원 중에서 368회로 가장 발언을 많이 한 의원이었으며 헌법제정을 위한 헌법기초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민주주의 헌법 수립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고, 남녀동등의 기본권에 대해서도 여성의 권한 신장을 주장하였다. 

또한 趙憲泳은 국민의료법 제정 과정에서 1950년 2월에 한의사제도를 배제한 洋醫단일법안이 제출되었을 때 강력한 반대를 표명하여 무산시키기도 하였다. 1944년 일제강점기에 공포된 朝鮮醫療令이 해방 후 여전히 효력을 가진 상황에서 당시 보건부는 한의사가 배제된 保健醫療行政法安을 文敎社會委員會에 제출하였는데 전국적으로 11만명이 서명한, 漢方醫 보호를 위한 법안을 만들라는 진정서가 위원회에 쇄도하였고, 趙憲泳의원도 강력히 반대함으로써 이 안은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지 못하고 폐기되었다. 趙憲泳이 납북된 이후 1951년에 비로소 한의사제도를 포함한 국민의료법이 공포되었다. 

 

해방 후 趙憲泳이 남한에서 활동한 시간은 짧으나 그의 저서는 널리 유행되었다. 가장 유명한 『通俗漢醫學原論』은 해방 후 1950년에 乙酉文化社에서 重刊되었으며 지금까지 醫門社, 眞玄, 學林社, 學園社 등의 출판사를 거치면서 간행되어 현재까지 애독되고 있다. 또한 윤구병이 『通俗漢醫學原論』에 주해를 달고 『한방이야기』로 서명을 바꾸어 1987년에 간행하였다. 

일제강점기 동안 간행되었던 『民衆醫術理療法』, 『肺病漢方治療法(肺癆證治)』, 『神經衰弱症治療法(心氣證治)』, 『胃膓病治療法(脾胃證治)』, 『婦人病治療法(女科證治)』 등은 각각 1955년에 杏林書院에서 한정판으로 重刊되었고, 이를 다시 합본하여 1963년에 『東洋醫學叢書:五種』이 간행되었다. 


『漢醫學의 批判과 解說』, 1957년 杏林書院서 重刊

또한 1942년에 한의학 부흥 논쟁의 글들을 모아 간행되었던 『漢醫學의 批判과 解說』은 1957년 杏林書院에서 重刊되었고, 정근식의 해설과 박석준, 최종덕의 보론을 덧붙여서 1997년에 『漢醫學의 批判과 解說』로 다시 출간되었다. 『海山隨筆集』, 『議會演說集』 등은 아직 미간 상태이다. 

趙憲泳이 남한에서 한의계에 몸담았던 시기가 대략 1930년대 초반부터 1950년까지의 20년 미만의 기간인데 그의 학문이 후학들에게 계승된 기록은 확실하지 않다. 단, 李鍾馨의 『韓國東醫學史』에서는 京城醫學專門學校 출신의 姜弼模가 趙憲泳을 계승하였고, 盧正祐가 師事하여 계보를 이었다고 하였다. 

 

姜弼模는 학교 졸업 후 한의학을 공부할 때에 趙憲泳의 『通俗漢醫學原論』을 읽었다고 회고하여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이고, 반면에 盧正祐는 자신의 저서인 『韓國醫學史』에서 趙憲泳을 언급하고 있지 않아 師承관계에 대해서는 추가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또한 해방 후 한의과대학에서 韓方生理學을 연구하였던 尹吉榮도 젊은 시절에 『通俗漢醫學原論』을 읽고 한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였으며, 이후 그가 한의학의 현대화에 노력한 점도 趙憲泳의 입장과 유사한 점이 있다. 

한의학 분야 이외의 저작물 중 茶山 丁若鏞에 대한 논설이 다시 학술잡지에 수록되기도 하였는데, 1974년 12월에 「醫學 上으로 본 茶山先生」이 『韓國學』에, 1979년 12월에 「漢醫學上으로 본 茶山醫學의 特色」, 「醫學上으로 본 茶山先生」 등이 『茶山學報』에 부록으로 수록되었다. 趙憲泳은 광복 이후 주로 정치 활동에 주력하여 언론 및 잡지에 기고한 글들도 대부분 정치적 이슈에 대한 것들이었다. 

 

1947년 1월부터 5월까지 『再建』에 「嶺南騷擾의 眞相·原因·對策」, 「國立서울大學校案과 學生盟休에 對하여」, 「右翼陣營의 行動統一을 强調함」 등을 연달아 발표하였고,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후에는 1948년 6월과 9월 京鄕新聞에 각각 「憲法制定에 臨한 私案」, 「國際聯合과 韓國獨立-大西洋憲章의 精神을 想起하라」 등을 발표하였으며 동년 9월에도 『海東公論』에 「新國家憲法論」을 발표하였다. 

1949년 5월과 10월에는 東亞日報에 각각 「議政壇上의 一年回顧」, 「國民會運營엔 愼重(上)」을, 동년 5월 『새한민보』에 「美國撤退와 國內輿論」, 8월 『民聲』에 「얄타協定과 極東暗雲」, 8월과 11월 서울신문에 각각 「건국1년의 업적(정계편)」, 「和戰 兩樣의 態勢」, 9월 『新天地』에 「北大西洋同盟과 太平洋同盟」, 11월 『國會報』에 「國會와 政府」 등을 각각 발표하였다. 

1950년에는 1월에 『民聲』에 「歸屬財産은 어떻게 處理되나」, 『新天地』에 「現政府에 對한 나의 要望」 등을 각각 발표하였고, 2월 『民族文化』에 「國內政界의 回顧와 展望」, 4월 東亞日報에 「民族的 重大危機」를 발표하였다. 정치적 주제 이외의 기고로는 1949년 10월 『民族文化』에 「民族精神理念과 그 昻揚方法論」의 좌담 내용이 실렸고, 1950년 漢城日報에 당시 文壇을 비판한 「權力에 屈從阿附 淸廉한 節操 없다」가 게재되었다. 

 

납북 후 趙憲泳 활동 관련한 공개 자료는 제한적

북한으로 납북된 이후에 趙憲泳은 정치 활동보다는 주로 한의학 연구 및 임상 활동을 진행하였는데 평양의과대학 동의학부 교수를 지냈으며 동의학연구소 소장으로 연구를 주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1965년에 동의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과학연구와 임상 치료에 힘썼으며 특히 심장병에 대한 뜸 치료법 등 가치 있는 치료법들을 개발하였다. 

『동의처방학』, 『동의용어사전』 등을 집필하였고 『醫方類聚』, 『醫林撮要』, 『東醫寶鑑』 등 고전 의서들을 번역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국내에서 『醫方類聚』 국역본은 1991년에 간행되었고, 趙憲泳이 金東日 등과 번역한 『東醫寶鑑』은 1994년에, 조선시대 楊禮壽의 『醫林撮要』 번역서도 1999년에 간행되었다. 

 

1956년에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집행위원이 된 이후 1988년 사망 직전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의 서기장까지 맡아서 일하였으며, 1971년 1월부터 1972년 2월까지는 북조선 국가원수 겸 국무원수상 예하 朝鮮東洋醫科學特報秘書官으로 활동하였다. 

1988년 5월 23일 사망 때에는 북한으로부터 적십자사를 통하여 소식을 알려왔으며, 평양시 삼석구역에 있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의 특설묘지에 안장되었고 2004년경 평양시 용성구역의 재북인사들의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납북 이후 趙憲泳의 활동에 대해서는 공개된 자료가 제한적이므로, 향후 남북교류를 통하여 정보를 수집한 이후 보다 정확한 평가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民族的重大危機_19500417.png
民族的重大危機
(1950년4월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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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國家憲法論(1948년9월10일)

 

한의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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